2013년 5월 8일 수요일

'본드24'에서 고쳐야 할 점 (1) - 오프닝 씬

2012년 11월8일은 007 시리즈 23탄 '스카이폴(Skyfall)'이 북미지역에서 개봉한 날이다. 원래는 11월9일 개봉이었지만 아이맥스 버전이 하루 먼저 개봉했다.

개봉 당일 첫 회를 아이맥스로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본드팬이거나 007 시리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개봉 당일 첫 회를 아이맥스로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향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만 더 기다리면 굳이 비싼 아이맥스가 아닌 일반 버전으로 볼 수 있는 데도 11월8일 목요일 오후에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처음엔 혼자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없었지만, 상영 시간이 가까워오자 아이맥스 상영관이 거의 꽉 찰 정도가 됐다.

역시 워싱턴 D.C에 본드팬들이 많이 사는 모양이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기 무섭게 아이맥스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의 제임스 본드 영화는 묵직하고 진지한 스타일로 알려졌는데, '스카이폴'이 시작하자 마자 다니엘 크레이그가 스크린에 나타나자 관객들이 마치 굉장히 웃기는 코메디언을 본 것처럼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90년대에 지금은 고인이 된 레슬리 닐슨(Leslie Nielsen)의 '네이키드 건(The Naked Gun)'을 보러 영화관에 갔을 때 닐슨의 얼굴이 스크린에 나타나자 관객들이 낄낄거렸던 적이 있다. 레슬리 닐슨은 코메디언이었고 '네이키드 건' 시리즈도 코메디 영화였으므로 관객들이 닐슨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진지하고 묵직하고 사실적이고 불X까지 까놓을 태세로 내면를 보여주기 좋아한다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보고 관객들이 왜 웃은 것일까?

영화가 시작하기 무섭게 로스웰(Roswell) 에일리언처럼 생긴 제임스 본드 실루엣이 "바밤~!" 하는 배경음악과 함께 스크린에 나타난 것이 유치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스웰 에일리언이 카메라 쪽으로 가까이 걸어오면서 어둠 속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Guess who?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임스 본드가 핸드건을 꺼내 폼까지 잡았다.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영화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핸드건을 쥐고 우스꽝스러운 '코스프레' 놀이를 하는 걸 보는 데 지쳐있었기 때문에 007이 다니엘 크레이그로 교체된 것을 환영했었는데, 크레이그까지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본드', '코스프레 본드' 시대를 접고 '연기 하는 본드', '평범한 본드'를 기대했더니 크레이그까지 핸드건을 처음 만져보는 중학생처럼 핸드건을 쥐고 폼잡기 쇼를 한 것이다. 그것도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오프닝 시퀀스부터 말이다. '이런 데도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제임스 본드를 계속 맡길 이유가 있나'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스카이폴' 아이맥스 상영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본드가 방 안으로 들어간 이후 첫 대사가 나올 때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굉장히 유치하고 썰렁해 보였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은 나름 쿨한 오프닝 씬을 연출하려 한 듯 보였으나 거꾸로 관객들을 웃기고 말았다.

요새 이런 유치한 씬을 보면서 쿨하다고 생각할 관객들이 몇이나 될 지 궁금할 뿐이다. 유치하고 간지러운 영화에 굉장히 관대한 사람들이라면 혹시 또 모르겠지만, 요즘엔 이런 식의 'Titillating Crap'을 보고 멋지다고 할 관객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스카이폴' 미국 개봉 첫 날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은 다수의 관객들은 '스카이폴'의 오프닝 씬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지난 90년대 '네이키드 건'을 보러 온 관객들이 레슬리 닐슨의 얼굴을 보고 낄낄거렸던 것처럼 이번엔 '스카이폴'을 보러 온 관객들이 스크린에 나타난 다니엘 크레이그를 보고 낄낄거렸으니 말이다.

이 순간부터 이번 영화도 왠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오프닝부터 상당히 'Cheesy'한 것이, '스카이폴'도 크게 기대할 만한 영화가 아니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첫 단추를 잘못 끼면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다.

만약 007 제작진이 과거에 하던 대로 건배럴 씬으로 영화를 시작했더라면 새로울 건 없었을지 몰라도 웃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건배럴 씬의 위치를 옮기고 이렇게 웃기는 씬으로 영화가 시작하도록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물론 건배럴 씬의 위치를 바꾼 이유를 둘러대려면 여러 가지를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yada yada shit'은 더이상 듣고 싶지도 않다. 어쨌든 간에 '굳이 안 건드려도 될 것을 건드린 것' 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007 시리즈 1탄 '닥터 노(Dr. No)'부터 오프닝 시퀀스로 사용해온 건배럴 씬을 계속 사용하면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 영화에 준 변화가 퇴색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007 제작진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과거와 차이가 나도록 만들고자 노력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이 그 '변화'에 얼마나 자신이 없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를 선보일 자신이 확실하게 있었다면 치사하게 건배럴 씬의 위치를 바꾸는 '변화'에 목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007 제작진은 지금까지 50년간 여러 차례 변화를 줘왔다. 숀 코네리(Sean Connery)가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를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나자 조지 레이전비(George Lazenby)로 제임스 본드를 교체한 007 제작진은 판타지 가젯을 영화에서 걷어내면서 다시 이언 플레밍(Ian Fleming)의 원작소설로 되돌아간 바 있다. 로저 무어(Roger Moore) 시대에도 제임스 본드를 우주로 내보냈던 '문레이커(Moonraker)' 이후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를 통해 다시 제임스 본드를 원작의 캐릭터로 되돌려놓은 적이 있다.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으로 007이 교체되자 007 제작진은 로저 무어의 핸썸 플레이보이 제임스 본드 이미지를 지우고 어둡고 진지한 스타일의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은 로저 무어 시절의 전형적인 007 시리즈 제임스 본드 캐릭터로 다시 되돌아갔으며, 브로스난의 뒤를 이은 크레이그는 80년대 중반 티모시 달튼이 했던 것처럼 브로스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지우고 어둡고 진지한 캐릭터 만들기를 다시 하고 있다.

이렇게 007 시리즈는 주연 배우가 바뀔 때, 또는 변화를 줄 때가 되었다 싶을 때마다 영화에 크고 작은 변화를 줘왔다. 그러므로 007 제작진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변화를 주려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항상 하던 것이므로 크게 특별할 건 없다.

그러나 문제는 007 제작진이 이상한 쪽으로 변화를 준다는 데 있다. 쓸데 없는 것을 바꾸거나 유행을 따른다며 남의 영화를 까놓고 모방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변화를 주더라도 지킬 건 지켜가면서 했는데, 요샌 지나칠 정도의 뒤집어 엎기 식 변화 주기에 재미를 붙인 듯 하다.

이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그래도 최소한 건배럴 씬과 제임스 본드 테마(James Bond Theme) 정도는 지켜줄 필요가 있다. 건배럴 씬과 제임스 본드 테마가 빠지면 더이상 오피셜 007 시리즈가 아니다. 오피셜 007 시리즈와 언오피셜 제임스 본드 영화들을 구분지어주는 게 바로 건배럴 씬과 제임스 본드 테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건배럴 씬은 영화의 맨 마지막으로 이동했으며, 그 유명한 제임스 본드 테마도 영화 도중에 듣기 어려워졌다. 얼핏 봐선 오피셜 007 시리즈인지 다른 일반 헐리우드 액션 영화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오피셜 007 시리즈를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파괴다.  이것은 변화를 잘못 주는 것이다. 007 제작진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007 시리즈를 007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도록 '변화'를 주는 데 미쳐있는데, 아무리 변화가 좋다고 해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007 제작진은 요즘 변화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그들도 007 시리즈에 변화를 주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과연 어디까지 변화가 가능한지 그 한계를 시험하는 듯 하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묻고 싶다. 많은 본드팬들이 "너무 휘면 부러질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는 점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본드24'부턴 어지간 하면 건배럴 씬을 다시 오프닝 시퀀스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캐릭터가 앞으로 어찌 되든, 스토리가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간에 일단 오프닝 시퀀스부터 차근차근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안정을 되찾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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