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월요일

'러시', 오랜만에 나온 올드스쿨 남성영화

스포츠 영화 중 재미있는 영화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재미있게 보기 어려운 영화 쟝르 중 하나가 스포츠 영화이기도 하다. 대본이 없는 드라마라는 게 스포츠의 묘미라서 그런지 대본이 있는 스포츠 영화엔 흥미가 안 끌릴 때가 많다. 라이브 스포츠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클리셰 투성이의 스포츠 영화까지 볼 필요를 못 느낄 때도 많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주 스페셜하거나 등장 캐릭터가 흥미진진한 등 드라마적인 요소가 풍부하다면 또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론 하워드(Ron Howard) 감독의 새 영화 '러시(Rush)'는 어느 쪽일까?

크리스 헴스워스(Chris Hemsworth), 대니얼 브뤌(Daniel Bruhl) 주연의 '러시'는 70년대에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던 영국 포뮬라 원(Formula One) 레이서 제임스 헌트(James Hunt)와 독일 레이서 니키 라우다(Niki Lauda)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레이스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조롭다.

제임스 헌트(크리스 헴스워스)는 술, 담배, 여자, 섹스를 즐기는 플레이보이 타잎의 영국 레이서다. 반면 니키 라우다는 헌트처럼 라이프를 즐기는 타잎이 아니라 모든 걸 치밀하게 계산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진지한 레이서다. 포뮬라 3서부터 라이벌 사이가 된 헌트와 라우다는 포뮬라 원에서도 치열한 라이벌 레이서가 되어 1976년 시즌 포뮬라 원 월드 챔피언 자리를 놓고 격돌한다.

'러시'는 서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두 라이벌 레이서들이 벌이는 위험한 경쟁, 승리에 대한 투지와 집념, 그리고 우정 등을 그린 영화다.


'러시'는 요새 보기 드문 올드스쿨 남성영화였다. 술, 담배, 여자, 섹스, 자동차, 목숨을 건 짜릿한 레이스, 터프가이 레이서들의 투지와 우정 등 남성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골라서 모아놓은 영화였다. 최근엔 남자다운 캐릭터가 나오는 제대로 된 남성영화가 없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성인 남성들을 위한 영화를 본 것 같았다.

두 명의 메인 캐릭터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최근 들어선 남자다운 남성 캐릭터들이 헐리우드 영화에서 사라진 바람에 "성인 남성 관객들을 위한 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가 없었다. 그러나 '러시'는 달랐다. 수많은 여자들을 끌고 다니며 라이프를 즐기는 멋쟁이 플레이보이 제임스 헌트, 레이스 도중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병실에서 고통을 참으며 헬멧을 쓰려고 노력하는 불굴의 투지를 지닌 니키 라우다 모두 남성들이 동경할 만한 캐릭터들이었다. 하나는 즐기는 타잎이고 다른 하나는 치밀한 타잎이라는 큰 차이점이 있었지만 두 캐릭터 모두 용기와 배짱이 두둑하고 집념과 투지 역시 남다른 터프가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토르(Thor)', '어벤져스(The Avengers)' 등 청소년용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호주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는 '러시'에서 기저귀를 던져버리고 레이디킬러 본능을 드러내면서 굵고 짧고 위험한 삶을 즐긴 플레이보이 레이서 제임스 헌트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으며, 큰 부상에서 완쾌하기도 전에 레이스 트랙으로 달려가는 불굴의 터프가이 레이서 니키 라우다 역의 독일 배우 대니얼 브뤌도 제임스 헌트 역의 크리스 헴스워스가 들러리로 보이도록 만들 정도로 라우다 역을 멋지게 연기했다. 스타일리쉬 파트는 제임스 헌트의 몫이었고 드라마틱 파트는 니키 라우다의 몫이었는데, 헴스워스와 브뤌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줄거리는 단순했다. 크게 특별한 얘기는 없었다. 큰 부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지다가 완쾌하기도 전에 레이스로 복귀한 니키 라우다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했지만, 부상의 고통을 참으며 경기에 출전한다는 자체는 크게 새로운 얘기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포뮬라 원 레이싱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였는지 영화의 세계에 쉽게 빠져들기 어려웠다. '러시'라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제임스 헌트, 니키 라우다가 누군지 전혀 몰랐으니 생소한 인물들이 나오는 생소한 스포츠에 대한 영화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포뮬라 원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만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 '러시'는 포뮬라 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보고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보다 친숙한 인물들이 나오는 친숙한 스포츠에 대한 영화였더라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레이스 씬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F1, NASCAR 등과 같은 자동차 경주 중계방송을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인지 영화의 레이스 씬도 왱왱거리는 엔진 소리만 들렸을 뿐 스릴과 스피드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동차 경주 영화들이 대부분 비슷비슷하듯 '러시'의 레이스 씬도 그다지 익사이팅해 보이지 않았다. '드라마 먼저, 레이스 나중'의 영화일 것으로 예상했으므로 크게 놀랍진 않았지만, '러시'도 빠른 속도로 질주할 때의 상황과 기분을 실감나게 표현한 자동차 경주 영화는 아니었다. 실제로 달릴 때의 스피드, 사운드, 흔들림, 그리고 이 속도로 달리다 사고가 나면 병원행이 아니라 한방에 묘지로 직행이라는 짜릿함 같은 게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러시'는 스페셜한 스토리와 흥미로운 캐릭터가 나오는 스포츠 영화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그렇고 그런 스포츠 영화였을까?

아무래도 스포츠 영화로썬 크게 새로울 게 없는 영화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굵은 줄거리가 트레일러에 다 나와있을 만큼 스토리는 단조로웠고 레이스 씬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또한, 생소한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라서 영화의 세계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하지만  서로 극과 극인 두 명의 라이벌 레이서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면서도 서로 우정과 동지애를 나누는 모습이 뭉클하게 와 닿은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스포츠 영화 클리셰였는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자동차 경주 영화나 스포츠 영화, 또는 바이오픽으로써는 잘 모르겠어도 두 남자의 경쟁과 용기, 그리고 우정을 그린 남성용 드라마로써는 만족스러웠다. 그들이 포뮬라 원 레이서냐, 카우보이냐, 아니면 군인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재와 쟝르 같은 것을 떠나 두 멋진 남자의 사나이다운 이야기가 가장 매력적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러시'는 볼 만한 영화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좀 크게 했기 때문인지 기대했던 만큼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런타임 2시간 동안 지루함을 모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웰 메이드 영화라서 만족감이 든 것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나온 올드스쿨 남성영화라는 반가움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살짝 헷갈리기도 하지만, "둘 다"라고 하고 끝내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만약 이번 영화를 크리스 헴스워스의 제임스 본드 오디션으로써 본다면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 같다. 헴스워스는 훤칠하고 체격이 좋은 데다 유머 감각이 풍부한 핸썸한 플레이보이 기질도 보이는 게 미래의 제임스 본드 감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영화 '러시'에서 자신을 "헌트, 제임스 헌트"라고 소개하는 씬에서 웃지않을 수 없었던 것도 헴스워스의 제임스 헌트가 제임스 본드와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블론드라는 점이 약간 걸리긴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가 '블론드 본드' 비난 폭탄을 먼저 맞아줬으므로 '블론드 본드' 2번타자는 부담이 훨씬 덜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지켜볼 가치가 있을 듯.

댓글 2개 :

  1. 비슷한장르의 드리븐도 전 괜찮게 봤던터라 기대가 돠네요

    그나저나 햄스워스가 본드한다라...죠스가 잘생겨지면 햄스워스일것같네요ㅋㅋㅋ

    워낙 배우가 역발산의 기세를 뿜는 항우같은 이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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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생각엔 괜찮을 듯 합니다. 실제로 헐리우드 스파이 역 제의를 받은 적도 있는 걸로 압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뜬 작가 빈스 플린의 스파이 캐릭터 역 제의를 받았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헴스워스가 6피트4인치이고 티모시 달튼이 6피트2인치니까 지나치게 큰 것도 아닌 것 같구요.
      체격 좋은 헝키 스타일인 건 맞지만 얼굴이 곱상해서 우악스러워 보이진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전 헴스워스가 맡으면 소프트한 브로스난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겠단 점을 걱정했거든요.
      하지만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난 얼굴에 젊고 건장한 바디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몇 해 전에 마블이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토르 역을 제의했던 걸로 알려진 적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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