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편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에서 백인이 아닌 유색인이 리딩(Leading) 본드걸을 맡았던 영화는 몇 개일까?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모두 본 사람들이라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을 것이다.
'두번 산다(You Only Live Twice/1967)', '투모로 네버 다이스(Tomorrow Never Dies/1997)',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2002)' 세 편이 전부다.
일본에서 촬영한 '두번 산다'에는 일본 여배우 아키코 와카바야시(AkikoWakabayashi)와 미에 하마(Mie Hama)가 리딩 본드걸로 출연했고, 중국과 얽힌 사건을 다룬 '투모로 네버 다이스'는 중국 액션영화로 널리 알려진 양자경(Michelle Yeoh)이 리딩 본드걸을 맡았다.
즉, 현지 여배우가 메인 본드걸을 맡는 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경우에만 아시아 배우들에게 리딩 본드걸의 기회가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출신 여배우/모델이 007 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우는 꽤 많아도 주연급을 맡은 건 '두번 산다'와 '투모로 네버 다이스' 두 편이 전부기 때문이다.
▲'두번 산다(1967)'의 아키코 와카바야시(왼쪽), 미에 하마(오른쪽)
▲'투모로 네버 다이스(1997)'의 양자경
흑인 여배우가 리딩 본드걸을 맡은 제임스 본드 영화는 할리 베리(Halle Barry)가 미국 NSA 에이전트로 나온 '다이 어나더 데이'가 처음이다.
아시아 출신 배우들이 2편의 007 시리즈에서 리딩 본드걸을 맡는 동안 흑인 여배우에겐 '다이 어나더 데이' 이전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다이 어나더 데이(2002)'의 할리 베리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부 영화팬들이 할리 베리를 깎아내리기 시작한 것.
'다이 어나더 데이' 영화 자체가 약간 문제가 있었던 만큼 할리 베리가 연기한 '징크스'라는 캐릭터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아무리 공정하게 평가해도 할리 베리가 연기한 징크스가 베스트 본드걸 리스트에 속하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순수한 영화평이 아니라 왠지 핵심이 다른 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비판이 눈에 띄었다는 것.
대놓고 '흑인 여배우가 리딩 본드걸을 맡은 게 싫다'고는 못 해도 할리 베리와 함께 '다이 어나더 데이'에 본드걸로 출연했던 백인 여배우 로사먼드 파이크와 비교하면서 우회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았다. 할리 베리가 '007 시리즈 사상 최악의 본드걸'이라면서 얼굴까지 붉히면서 말하더니 곧바로 '할리 베리 말고 다른 여배우(로사먼드 파이크)가 훨씬 낫더라'고 하는 식이다.
한번은 한 50대 미국인 백인 남자가 할리 베리의 본드걸 연기를 깎아내리길래 '할리 베리가 본드걸로 아무리 한심했어도 다른 본드걸(로사먼드 파이크)보단 낫지 않았냐'고 슬쩍 떠봤더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펄쩍 뛰더라.
인터넷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이런 사람들을 만나 직접 들어보니 '인종편견'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시아 여배우들에게 리딩 본드걸 자리를 하는 수 없이(?) 내준 것을 제외하곤 매번 백인 여배우가 맡아오던 리딩 본드걸 자리를 흑인 여배우에게 내줬다는 것이 상당히 불쾌한 듯 했다.
그렇다고 흑인 여배우/모델들이 007 시리즈에 출연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리딩 본드걸은 아니었지만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1973)'의 글로리아 헨드리(Gloria Hendry), '뷰투어킬(A View To A Kill/1985)'의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 등 007 시리즈에 출연한 흑인 여배우들은 여럿 된다. 따라서, 흑인 여배우가 007 시리즈에 출연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것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1973)'의 글로리아 헨드리
▲'뷰투어킬(1985)'의 그레이스 존스
결국 문제는 리딩 본드걸이다. 인종편견을 갖고 있든 없든 상관없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리딩 본드걸은 무조건 백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시아 여배우에게도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영화 '두번 산다'에서 일본 여배우 2명이 리딩 본드걸을 맡은 것에 대해서는 이언 플레밍 원작에서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일본 여인이 나오는 만큼 별 문제 없었는 지 모르지만 '투모로 네버 다이스'의 양자경은 사정이 달랐다. '007 시리즈를 중국 무술영화처럼 만들어 놓았다'는 비판을 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영화 때문에 앞으로 아시아계 여배우가 리딩 본드걸을 맡기 더욱 힘들어졌는 지도 모른다. 성별을 떠나 아시아 배우들이 헐리우드에서 액션배우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일부 본드팬들조차 '아시아 여배우가 본드걸이 되면 또 치고 박는 영화가 될 테니 아시아 여배우 사절'이라는 소리를 할 정도다. 아시아 여배우를 리딩 본드걸로 캐스팅하면 또 무술영화처럼 될 가능성이 높으니 '안전하게' 백인 여배우로 하라는 것이다.
얼마 전 인도 여배우 쉴파 셰티(Shilpa Shetty)가 '콴텀 오브 솔래스'의 본드걸로 캐스팅됐다는 루머가 나돌았을 때에도 일부 영화팬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백인이 아닌 여배우가 뚜렷한 이유 없이 리딩 본드걸을 맡는 것을 또 보고싶지 않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영국에서 탄생한 유러피언 어드벤쳐 시리즈인 만큼 '백인 본드걸'이 보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리딩 본드걸은 무조건 백인이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 피어스 브로스난을 대신할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물색할 당시 나왔던 '흑인 제임스 본드', '아시안 제임스 본드' 주장은 완전히 미친 소리지만 본드걸에선 충분히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 피부색이 바뀐다고 별 문제 없는 리딩 본드걸역이라면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상관없는 만큼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흑인 리딩 본드걸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일모레면 50주년이 되는 007 시리즈에서 흑인 여배우가 리딩 본드걸을 맡은 영화가 달랑 하나밖에 없다는 데 책임이 있다.
조연급 본드걸로 다양한 피부색의 여배우들을 출연시키는 것으로 구색을 맞출 수는 있지만 '리딩 본드걸은 백인 일색'이라는 007 시리즈의 전통은 그대로 남게 된다. 앞으론 007 시리즈에서 다양한 인종의 리딩 본드걸들을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